1985. 12. 『茶山學報』 7


茶山의 中和 개념


金  炫

Ⅰ. 머리말

Ⅱ. 성리학의 中和論

   1. 程頤의 未發·已發 개념

   2. 朱熹의 中和論

Ⅲ. 丁若鏞의 中和 해석

   1. 人間觀

   2. 未發·已發

   3. 愼獨工夫 

   4. 天地位焉․萬物育焉

 Ⅳ. 맺 음 말


Ⅰ. 머리말


「中庸」 1장에 나오는 中和說1)은, 그것이 「中庸」 본문의 문맥 속에서 갖은 의미도 작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역대 주석가들의 다각적인 해석으로 말미암아 더욱 심원한 뜻을 내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성리학의 인성론과 실천수양론에서 「中庸」의 中和說에 나오는 제개념을 모두 빼버린다면 그 나머지로는 거의 이야기할 것이 없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程頤는 자신의 性情體用論을 「中庸」의 中和說에 등장하는 “未發․已發”에 연관지어 설명하였고, 朱熹는 거기에 덧붙여 未發․已發時에 存養․省察의 공부를 행하는 수양론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中庸」의 中和개념은 茶山 丁若鏞의 철학-특히 그의 실천수양론-에서도 그 중요성을 잃지 않았다. 물론, 다산의 철학은 성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 새로운 학적 체계를 구축한 것인 만큼, 中和 문제에 대한 그의 해석도 程․朱의 그것과는 상이하다. 다산은 그의 비판적인 안목에서 「中庸」의 원의를 재조명하여 中和 개념에 대한 程․朱의 부희를 구축하는 한편, 지극히 논리적이면서도 실천에의 의지가 충일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

필자가 본 논문을 통해 시행하고자 하는 작업은 程頤․朱熹․丁若鏞의 中和 이론을 비교함으로써 성리학적 中和 해석과 다산의 中和 해석 간의 차이점을 규명하는 것이다.

유학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전개된 제분야의 이론들은 자연과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 도덕 실천의 가능 근거와 그 당위성을 설명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윤리적 행위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유학 사상의 모든 분야는 실천수양론을 그 결국으로 삼는다고도 할 수 있다.

「中庸」의 中和 개념에 대한 해석은 성리학, 다산학을 불문하고 실천수양론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다. 따라서 中和 해석을 둘러싼 양자의 상이점을 밝히는 것은 곧 실천수양론에 있어서의 차이점, 다시 말해 다산학에 내포된 ‘실천수양론에 있어서의 탈성리학적 면모’를 규명하는 작업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Ⅱ. 성리학의 中和論


宋代 성리학에서는 「中庸」의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易」 ‘繫辭’의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禮記」 ‘樂記’의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를 모두 동일한 맥락의 것으로 해석하여2) 未發의 中은 寂然不動한 心의 본체(性), 已發의 和는 外物에 접하여 사려가 생겨 난 상태(情)에 연계시켰다. 이러한 해석 방식이 채택된 것은 다분히 불교의 영향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불교의 이른바 靜寂한 상태의 心의 본 모습은 如來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心性本淨’의 사상이 유교 경전인 「中庸」의 中和 이론에 깊이 침투하게 된 것이다.


1. 程頤의 未發․已發 개념3)


「中庸」에서 말하는 “喜怒哀樂의 未發”이 곧 생각 [思]의 未發이라고 하는 성리학적 中和 해석의 단초는 程伊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구조적․원리적인 측면(體, 性)과 현상학적 발용의 측면(用, 情)으로 나누어 보고 이것을 가각 「中庸」의 未發․已發에 분속시켰다. 따라서, 일체 思慮는 心의 발용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已發에 속한다고 간주한 것이다.4) 이때 ‘中’이란 아직 심리 현상으로 발출하지 않은 未發心(性)의 이상적인 상태를 묘사한 것이요,5) ‘和’란 未發心의 원리․구조가 은폐 혹은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발현된 상태를 지칭한다6)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개념 정의와 아울러, 이천은 未發 상태의 中을 涵養 공부로써 보존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7) 성리학에서 말하는 함양 공부(이천의 용어로는 ‘敬’의 공부)8)란 자신의 내면에 갖추어져 있는 心性 본래의 이상태(中)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이천의 전제에 따르면, 이 때의 이상적 本然之性은 未發의 상태에서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함양 공부와 未發의 中을 연계시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런데, 함양 공부는 그 내용에 있어서 이렇듯 未發의 中을 겨냥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실행은 어디까지나 ‘已發’에 관련지을 수밖에 없다. 함양공부라는 것이 일체 사려를 끊는 無念無想의 禪定과 동일한 것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라면,9) 일체 사려가 已發이라고 한 이상, 함양 공부도 당연히 已發에 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천이 말하는 함양 공부는 그것이 已發 상태에서 행해짐을 주목하면 ‘已發의 공부’요, 未發의 中을 위한 공부임을 지적하면 ‘未發의 공부’이다. 이것은 이천이 「中庸」의 未發을 思慮의 未發로 간주하면서 未發상태의 性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결과이다. 이천의 이와 같은 이중적 사고는 후세의 학자, 특히 그를 사숙한 朱晦庵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2. 朱熹의 中和論10)


朱晦庵은 함양 공부를 未發․已發 양자에 연계시키는 이천의 이론을 납득하지 못한 가운데 심성 수양을 已發에만 귀속시키는 이론을 세웠다. 이른바 그의 中和舊說11)인데, 여기에서 그는, 思慮의 未發은 논리적 차원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어느 특정시간, 특정 장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12) 未發이란 心體의 유기적 구조를 무시간적으로 포착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에서는 未發의 때, 已發의 때를 시간적으로 구별할 수 없으며, 또 未發時의 수양이라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회암의 주장이었다.13) 수양은 단지 사려가 발출한 已發 상태에서만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회암이 주장한 수양론은 사건 사건에 부딪칠 때마다 새롭게 발현하는 마음의 기미를 잘 살피는 ‘致察’과 발현한 마음 가운데 도덕적인 것을 붙들어 잃지 않는 ‘操存’이었다.14)

그 후 회암이 자신의 이같은 생각을 돌이키게 된15) 이유는 性의 이상적인 본 모습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 그것의 발현시에 기미를 살피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6) 마치 거울의 빛을 밝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울을 깨끗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따라서, 그는 그와 같은 수양(涵養 혹은 存養)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 초기에 견지하였던 자신의 未發․已發 개념을 수정하였다. 초기 이론에서는 未發․已發이 무시간적․논리적 구분이었던 데 반해 후기 이론에서는 명백히 사려가 발출하지 아니한 때, 사려가 발출한 때로 구분된 것이다.17) 그는, 사려가 발출하지 않은 고요한 때(靜時)에는 본성을 보존하는 존양 공부를 행하고, 사려가 발출한 움직이는 때(動時)에는 마음의 기미를 살펴 절제하는 성찰 공부를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18) 주희암에게 있어서 이른바 敬의 공부는 이 존양 공부와 성찰 공부 두 가지를 함께 지칭하는 것이다.19)

이상과 같은 회암의 中和 이론은 그 자체 내에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未發을 사려의 未發로 전제한 이상, 심성 본래의 모습인 未發의 中은 수양과 무관한 것으로 놔두는 것이 오히려 논리적인 정합성을 이루는 길이 아닐까? 굳이 未發의 때[時]를 설정하고 이때 존양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 수양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결국, 주회암이 말한 未發時의 함양 공부란 불교의 禪定과 동일한 것, 즉 일체의 사려를 끊어 적정한 內性만을 남게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20)

더욱이 회암은 그의 만년의 저작인 」中庸章句」에서 다시 초기의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혼란을 가중시켰다. 여기에서 그는 未發의 中을 바로 性에 연결짓고, 已發의 和는 情의 바른 양태(情之正)라고 하였다.21) 性․情은 시간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未發時․已發時의 구분 또한 무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미발시에 존양 공부를 행하고 이발시에 성찰 공부를 행한다는 이론은 다시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22)



Ⅲ. 丁若鏞의 中和 해석


茶山 丁若鏞은 「中庸」에 관한 그의 두 해석서, 」中庸自箴」과 」中庸講義」에서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은 성리학적 中和論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자신의 새로운 中和 이론을 제창하였다. 단, 다산의 中和 이론은 단순한 성리학적 中和 이론의 비합리성을 발견한 데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그의 독특한 인간관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되어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1. 人間觀


성리학적 인성론과 다산의 인성론 사이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상위점은 仁義禮智信의 五常이 인간의 내면에 갖추어져 있느냐의 여부이다. 성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오상이란 자연 일반의 보편성(統體一太極) 아니면 적어도 인간 일반의 보편성(各具一太極)으로 간주된다.23) 반면 다산의 이론에서 오상이란 인간의 행위 가운데서 만들어지는 실천 덕목일 뿐이다.24) 물론, 다산도 도덕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내적인 근거로서 ‘靈明無形之體’를 주장하였다.25) 하지만 다산의 영명무형지체 안에는, 어린아이의 불행을 보았을 때 惻隱之心을 발출하고 모욕을 당했을 때 羞惡之心을 발출하는 따위의 구조적인 원리가 깃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善을 좋아하고 惡을 싫어하는 도덕적 기호일 뿐이다.26) 게다가 다산은 인간의 내면에는 선선오악(善善惡惡)의 도덕적 기호뿐 아니라 아무것이나 먹고 싶어 하고 아무데나 드러눕고 싶어하는 생리적 기호도 있다고 생각하였다.27) 이 두 가지 기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므로 모두 本然之性이라고 한다.28) 이러한 전제에서는 본연지성의 존재가 곧 인간의 도덕적 존엄성을 확보해 주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도덕적 기호와 생리적 기호와의 갈등을 극복하여 선한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만 인간의 도덕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결단이 용이하지가 않다. 배고프면 아무 것이나 먹고 싶고 피곤하면 아무데나 드러눕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강력한 생리적 욕구를 거부하고 미약한 도덕적 기호를 따르기 위해서는 생리적 욕구보다 더욱 강한 도덕 실천의 당위성을 느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다산은 上帝 개념을 도입하였다.

上帝는 나날이 인간들에게 도덕적인 명령을 내리며 그것의 이행 여부를 감시하는 존재이다. 상제의 降臨을 자각한 자는 그에 대한 두려움에서 克己復禮의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도깨비의 존재를 아는 자가 밤중에 거리낌없이 공동묘지를 지날 수 없듯이···29) 다산은, 상고시대에 도덕이 융성하였던 이유는 당시의 사람들이 상제에게 지성으로 제사를 드리고 나날이 감시함을 믿었기 때문인데 반해 오늘날 도덕이 타락하게 된 이유는 天을 理로, 鬼神을 二氣의 良能 따위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0)


2. 未發․已發


인륜 도덕은 오직 실천에 의해서만 확보된다는 사고는 그의 수양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中和 문제에 있어 다산이 程․朱에게 가장 먼저 터뜨린 포문은 바로 ‘未發’을 사려의 미발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죽은 나무, 불꺼진 재와도 같은 사려의 미발은 禪家의 入靜과 다를 바 없다.31) 다산은, 유학에서 추구하는 수양 공부는 결코 불교의 禪定과 같은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항상 상제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 경계하고 염려하며, 만사 만물의 이치와 변고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이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고도의 사유 활동이 ‘中’의 덕목을 이루는 진정한 未發時의 수양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32) 만약 미발이 사유의 미발이라면 이같은 수양법의 실행은 불가능하다. 다산은, 未發은 心知思慮의 미발이 아니라 喜怒哀樂의 미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33)

그러면 已發의 和는 어떻게 해석되는가? 已發 역시 희노애락의 이발일 뿐이다. 古文(」國語」)에서는 어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그의 삶을 기뻐하는 것 등을 가지고 희노애락의 절도라고 하였다. 已發의 和란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한다.34) 사건에 접하고 사람을 대함에 마땅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일컬어 “發而皆中節, 謂之和”라고 한 것이다. 이에 덧붙여 다산은, 「中庸」은 어디까지나 古文인 이상 古文의 氣味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35) 희노애락은 어디까지나 희노애락이지 심지사려로 확대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산은 기존의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中庸」의 中和說을 」易」 ‘繫辭’의 寂感說, 」禮記」 ‘樂記’의 “人生而靜···云云” 등에 연관짓지 않았다. 」易」에서 寂然不動, 感而遂通이라고 한 것은 막대기에 불과한 蓍草를 가지고 일단 점을 치게 되면 거기에 만물이 감응하여 천하의 일에 통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며,36)  」禮記」 ‘樂記’는 漢代 속유들의 위작이니 믿을 수 없다는 것37)이 다산의 주장이다. 아울러 그는, 繫辭의 寂感說을 끌어들여 「中庸」의 未發을 사려의 미발로 해석하는 것은 불교의 영향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38) 孔․孟의 학문적 전통은 그와 같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즉,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맹자도 “마음[心]의 기능은 생각함[思]이다. 생각하면 얻을 수 있다”라고 하여 생각[思]이 곧 수양의 근본임을 천명하였는데, 어떻게 그러한 뜻을 버려 두고 적연한 無思無慮의 상태를 우리 마음의 본체로 삼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39)


3. 愼獨工夫


성리학에서는 中和를 인간 심성의 원초적인 모습과 그것의 자연스러운 발용으로 이해하였기 대문에 심성 수양의 방법에 있어서도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는 存養․省察을 이야기하였다. 반면, 다산에게 있어서 中和란 도덕 수양의 결과로서 획득하는 것인 만큼 그 수양의 방법은 보다 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 다산은 ‘愼獨工夫’가 中和를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40)

「中庸」 본문에 쓰인 愼獨工夫說의 요지는, 은밀한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고(莫見乎隱), 희미한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으니(莫顯乎微) 군자는 보이지 않는 것(其所不睹), 들리지 않는 것(其所不聞)에 대해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이 은밀한 것(隱), 희미한 것(微)에 대한 朱熹의 해석은 “어두운 곳”(暗處), “미세한 일”(細事)이었다. 이 어두운 곳에서의 미세한 일은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만은 뚜렷이 보이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일이므로 군자는 이러한 일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삼가야 된다고 한 것이다.41) 그러나 이에 대한 다산의 해석은 주희의 그것과 상이하다.

다산이 이해한 隱과 微, 즉 其所不睹와 其所不聞은 눈으로 그 형체를 식별할 수 없고 귀로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靈明한 上帝에 대한 지칭이다.42) 이 영명한 상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가운데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그의 도덕적인 명령을 내리고 그것의 이행 여부를 감시한다. 따라서 군자는 未發의 때에 마음을 공경히 하고 상제를 섬겨, 항상 상제의 神明이 어두운 방구석에까지 강림한 듯이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자신에게 허물이 있을까 저어하고 과격한 행위를 범하거나 치우친 감정이 싹틀까 염려하며 자신의 마음을 평온하게 간직하고 마음의 씀씀이를 바르게 해서 밖으로부터 오늘 일에 대비한다. 여기에서 ‘中’의 덕목이 완성된다.43) 그리고 그와 같은 未發時의 수양에 기인하여 사건에 부딪치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치우침이 없는 감정을 발하는 데서 ‘和’의 덕목이 완성되는 것이다.44)

결국, 다산이 이해한 ‘中’의 의미는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함이요, ‘和’의 의미는 남을 대하는 태도를 바르게 함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中․和의 덕목을 이루는 데 필요한 요건은 愼獨工夫, 다시 말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상제를 섬기는 것이다. 상제는 어떻게 섬기는 것인가?

다산은, “하늘이 인간의 선악을 살피는 기준은 항상 인륜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몸을 닦고 하늘을 섬기는 것 역시 인륜을 지키는 데 노력함으로써 하는 것이다.”45)라고 하였다. 결국, 상제를 섬기는 것은 인륜 도덕을 지키는 것이요, 인륜 도덕을 지키는 것이 바로 中․和의 덕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그는 이 말에 앞서, “仁이란 인륜의 완성된 것이다.”46)라고 하였다.

다산은 비록 仁義禮智信의 五常이 인간에게 생득적으로 구비된 본연지성이라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상과 오상을 완성시키는 인륜 도덕의 가치를 경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오히려 인륜은 상제의 지상명령으로서 그리고 오상은 그러한 인륜의 완성태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다산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오상과 인륜 그리고 中和의 덕 그 어느것도 인간의 내면에 못박혀 있는 것이 아니요, 인간 개개인의 극기의 노력으로써 만들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中庸」 본문에서는 ‘中’을 “세상의 큰 근본”(天下之大本)이라 하고, ‘和’를 “세상에 두루 통하는 길”(天下之達道)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함은 모든 교화의 근본이요, 남을 대하는 태도를 바르게 하면 누구에게나 仁․義를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47) 주희는 이 大本․達道라는 말이 인간에게 구비된 性情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48) 그러나 다산은, 이 말은 어디까지나 신독공부의 결과로서 얻어진 中和의 덕에 대한 예찬일 뿐, 그것이 곧 세상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것임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中庸」의 中和說은 일반 사람들의 性情에 관한 통론이 아니라, 철저한 극기와 수양을 해 온 특정의 소수(군자)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다산의 기본적인 시각이다.49)


4. 天地位焉․萬物育焉


「中庸」 1장의 中和說은 “中和를 극진히 하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고(天地位焉) 만물이 자라난다(萬物育焉)”는 귀절로 끝을 맺는다. 이 역시 中和의 공에 대한 예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中’과 ‘和’는 어디까지나 인간 개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수행의 결과인데 반해, “天地位焉, 萬物有焉”은 자연 전체의 광대한 운행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 양자의 관계는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주희의 해석은 다분히 신비적인 느낌을 준다. 그는, “天地萬物은 본래 나와 한 몸이니 나의 마음이 바르게 되면 天地의 마음도 또한 바르게 되고, 나의 氣가 순하게 되면 天地의 氣도 또한 순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효험이 이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50) 자연과 인간은 원래 하나라는 物我一體의 입장에서 개인의 심성 수양이 직접적으로 자연의 位․育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 것이다. 반면, 이 문제에 대한 다산의 해석은 보다 현실적이다.

다산에 의하면 천지만물의 位育은 신독공부를 행한 군자가 통치자의 지위를 얻어 정치 일선에 나섰을 때, 그의 지혜와 노력에 의해서 달성되는 결과라고 보았다. 예컨대, 상고시대의 堯․舜이 人主의 지위를 얻고 皐․夔․稷․契의 卿相의 지위를 얻음으로써 자연을 조화롭게 다스려 태평의 치세를 이룩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경우를 일컬어 天地位焉․萬物育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51)

이 같은 해석에서 우리는 다산의 강력한 현실 지향 정신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군자의 인격 수양의 목적은 수양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 일선에 나아가 善政을 베푸는 데에 있는 것이다. 다산에게 있어, 군자가 자신의 덕성을 수양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다.52)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에게 부여된 교화의 책임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中庸」에서 군자의 도리로 제시된 ‘성실’(誠)은 “자신을 완성함일 뿐 아니라, 남을 완성시킴”(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이었다.53) 주희가 “은밀한 것을 찾고 괴이한 일을 행함”이라고 해석한 「中庸」 11장의 “素隱行怪”54)를 다산은 “까닭없이 은거하여 괴이한 일을 행함”이라고 해석하고 공자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한 것도55) 이러한 관점에서였을 것이다.



Ⅳ. 맺 음 말


仁義禮智, 孝悌忠信과 같은 유교적 윤리 덕목을 존숭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다산은 여타의 성리학자들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다산은, 그러한 윤리 도덕을 추구한 강력한 의지로 볼 때, 그에 비견할 바를 찾기 어려운 유교적 이상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단, 그와 같은 도덕의 실현은 자연의 원리 혹은 인간 내면의 본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 철저한 극기의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역설했다는 데에 다산의  실천수양론의 특질이 있다.

물론, 실천을 중시한 것은 성리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리학에서의 실천과 다산학에서의 실천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지극히 섬세한 유리 彫刻을 행여 깨지거나 마모되지 않도록 감싸고 보호하는 것이 성리학의 심성 수양이요 실천이라고 한다면, 다산이 말하는 실천은 진흙덩이와 같은 가능적 소재를 주무르고 두드려서 도덕이라는 형태로 완성시키는 것이다. 未發의 中, 已發의 和 그리고 天地萬物의 位育 그 어느것도 저절로 앉은 자리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산의 수양법은 잡념을 제거하고 寂靜한 內性만을 남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고도의 사유, 끊임없는 경계와 근심, 의지적인 결단 그리고 행위.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의 평형(中)과 절도에 맞는 감정의 표출(和)은 오직 이와 같은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이 존엄한 소이는 도덕성이 인간 내면에 그의 본성으로서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이 적극적인 행위로써 도덕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산이 도덕의 실천이라는 문제를 이와 같은 각도에서 연구한 것은 그가 실학자의 이름을 얻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고 생각한다.


1) “喜怒哀樂이 아직 발출하지 아니한 것을 中이라 하며, 발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고 한다. 中은 세상의 큰 근본이며, 和는 세상에 두루 통하는 길이다. 中과 和를 극진히 하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 和也者, 天下之違道.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有焉.)” (中庸 1장).


2) 徐復觀, 」中國人性論史」(대만, 中央書局, 民國52年) p.130 참조.


3) 程頤의 中和 이론은 그와 呂大臨과의 논변(伊川先生文集 권5) 및 蘇李明과의 문답(程氏遺書 권18)에서 살필 수 있다. 牟宗三의 」心體與性體」(대만, 正中書局, 民國57년) 二冊 pp.350~385에 이 자료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있고, 徐復觀의 」中國人性論史」 pp.128~134에도 두번째 자료(蘇李明과의 문답)에 대한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4)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곧 已發이다. [원주 : 생각과 喜怒哀樂은 같다.] (旣思, 卽是已發. [原註: 思與喜怒哀樂一般])” (程氏遺書 권18, 二程全書(서울, 경문사 영인본, 1981) p.137)


5) “中은 性의 體段을 묘사한 것이다.”(伊川先生文集 권5, 위의 책, p.362)


6) “선생(程頤)이 말하기를, ···赤子之心이란 발출하였으되 中에서 멀지 않은 것이다. ··· 大臨이 말하기를, 당신은, ‘赤子之心은 和라고는 할 수 있어도 中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위의 책 p.365)


7) “喜怒哀樂의 未發時에 存養을 말하는 것은 가하다.(若言存養於喜怒哀樂未發之時則可)” (程氏遺書 권18, 위의 책 p.137)


8) “敬이란 단지 涵養일 뿐이다.(敬只是涵養一事)” (위의 책 p.141)


9) 伊川은 자신이 말하는 敬의 공부(涵養공부)가 佛家의 禪定과 동일시되는 것을 기피하였다. 다음의 대화가 伊川의 그러한 의사를 보여준다. 이천의 제자가 “敬의 공부를 하는 데 의지[意]를 써야 합니까?”라고 묻자, 그는 “어찌 처음부터 의지를 쓰지 않겠는가? 의지를 쓰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게 된다”라고 하였고, 또 “敬은 곧 靜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靜이라고만 하면 불교의 설이 돼 버리니 靜字를 쓰지 말고 敬字를 써야 한다. 靜字만을 쓰게 되면 이는 잊어 버림[忘]이 된다”라고 하였다. (위의 책 p.129)


10) 朱熹의 中和 이론은 」中庸章句」 및 」中庸或問」 그리고 」朱子大全」에 수록된 與張欽夫(권30, 권32), 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권64), 已發未發說(권67), 中和舊說序(권75) 등에서 살필 수 있다. 이 중 」朱子大典」의 자료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牟宗三 著 」心體與性體」 三冊 pp.71~229에 게재되어 있다.


11) ‘中和舊說’이란 주희가 37세때 그의 벗 南軒 張敬夫에게 보낸 편지 및 그밖의 서한에서 밝힌 中和 문제에 관한 그의 초기 이론을 말한다. 훗날(43세때) 주희는 자신의 이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뜻에서 ‘中和舊說’이라 명명하고 아울러 자기 中和 사상의 변화 추이를 밝히는 ‘中和舊說序’를 저술하였다.


12) “대개, 渾然한 전체로서 사물에 응함이 무궁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天命의 유행이요, 그치지 않는 生生의 기틀이다. 비록 하루 사이에도 수만번 일어나고 수만 번 사라지나 그 寂然한 본체는 언제나 적연하지 않음이 없다. 이른바 未發이라는 것은 이와 같을 따름이다. 어떻게 한 가지 사물을 설정하거나, 한 때에 국한하거나, 한 곳에 제한하여 이것이 中이다 라고 할 수 있겠는가?”(朱子大全 권30 與張欽夫, 朱子大全(서울, 보경문화사 영인본, 1984) 上卷 p.479)


13) “(未發에 대해서) ‘때’라든가 ‘사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잘못이다.(今著一時字一際字, 便是病痛.)”(同上)

   따라서, 주희는 이천이 말한 “未發의 때에 存養을 함”(주7 참조)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었다. “語錄赤嘗疑一處說, ‘存養於未發之時’一句.”(同上)


14) “비록 物欲이 솟구치는 가운데에도 그 양심의 싹은 언제나 사물에 인연하여 발현하지 않음이 없다. 이에 배우는 자가 세밀하게 살피고(致察) 붙들어 보존한다면(操存) 아마도 大本․達道의 전체에 관통하여 그 최초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同上)


15) 주희는 그의 나이 40세 때 中和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크게 수정하였다. 그의 새로운 이론을 보여주는 자료는 答張欽夫(朱子大全 권32, 마지막에 수록된 서한), 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朱子大全 권64), 未發已發說(朱子大全 권67) 등이다. 牟宗三, 」心體與性體」 三冊, p.130 참조.


16) 주희는 자신의 옛 이론에 대해 “心․性의 이름을 명명함에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日用工夫에 전혀 本領이 없었다”고 반성하였다.(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 朱子大全 中卷 p.542) 致察에 우선하는 涵養공부를 빠뜨렸다는 이야기이다.


17) “思慮가 싹트지 아니하고 사물이 이르지 않은 때[時]를 喜怒哀樂의 未發이라 한다.”(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 위의 책 p.542; 已發未發說, 같은 책 p.600)


18) “군자는 움직임과 고요함, 언어와 침묵에 관계 없이 敬에 힘써야 한다. 未發의 때에는 敬이 存養의 내용을 주관해야 하고, 已發의 때에는 敬이 省察하는 사이에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答張欽夫, 朱子大全 上卷 p.543)


19) 주희는 이 두 가지 중에서도 涵養 공부가 더 우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存養하지 않고 사물에 따라 察識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浩浩汒汒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答張欽夫, 위의 책 p.544)


20) 주희뿐 아니라 후대의 성리가들도 이러한 이론을 견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예컨대, 李栗谷과 같은 이는 함양공부를, “다만 적막한 가운데 염려를 일으키지 아니하고, 고요한 가운데 조금도 혼미하게 하지 않는 것일 따름”(聖學集要, 栗谷全書(서울,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 1978) p.472)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식의 수양 방법과 불교의 禪定 간에는 아무런 차이점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21) 中庸章句 1장, 經書(서울,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 1978) p.774.


22) 반면, 주희는 다른 「中庸」 해석서 」中庸或問」에서는 후기의 이론이 재천명되고 있다. 주희의 中和 이론이 이처럼 일관성을 결여한 데에 대해 다산은 정이천 문하에서의 中和 논의가 본래 명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朱熹도 우왕좌왕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中庸講義, 與猶堂全書 제2권(서울, 경인문화사 영인본, 1982) p.63)


23) 朝鮮 肅宗 연간 기호학파 성리학자들간의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켰던 人物性同異의 문제는 바로 이 두 가지 입장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人物性同論을 주장한 洛派 학자들은 보편적인 天理의 내용이 바로 五常이라고 하였고, 그에 반대하여 人物性異論을 주장한 湖派 학자들은 오상이란 인간의 氣質 속으로 墮在한 天理, 즉 인간의 分殊之理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24) “仁義禮智란 본래 우리의 행위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마음 속에 갖추어진 현묘한 이치가 아니다.”(中庸講義, 위의 책 p.61)


25) “사람의 胚胎가 이루어지면 하늘은 거기에 靈明無形의 本體를 부여한다. 그것의 됨됨이는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싫어하며, 덕을 좋아하고 더러움을 부끄러워하니, 이것을 일컬어 性이라고 하고 또한 性善이라 하는 것이다.”(中庸自箴, 위의 책 p.45)


26) “孟子는 性善의 이치를 논함에 기호로써 그것을 밝혔고, 孔子도 ‘항상된 도리를 붙잡아 덕을 좋아한다’(秉彛好德)는 싯구를 인용하여 인간의 性을 증명하였다. 기호를 버려 두고 性을 말하는 것은 洙泗學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위의 책 p.46)


27) “인간의 性은 道義의 氣質 두 가지를 합하여 하나의 性으로 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의지가 있어 그것이 함께 발출한다.”(孟子要義, 위의 책 p.135)


28) “本然之性을 논한다면, 인간에게 있어서는 道義와 氣質을 합하여 하나의 性으로 한 것이 本然이다.”(同上)


29) “해질 무렵 인적이 없는 묘지를 지나가는 자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두려워하게 되니 이는 도깨비가 요귀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밤중에 산림 속을 지나가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두려워하게 되니 이는 호랑이와 표범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군자가 어두운 방 안에 있으면서도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상제가 있어 그에게 임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中庸自箴, 위의 책 p.47)


30) “옛 사람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섬기고 귀신을 섬겼다. 動情․思念이 싹틀 때에 혹은 성실하고 혹은 거짓되며 혹은 선하고 혹은 악하게 되니 바로 이러한 일을 경계하여 ‘나날이 감시함이 여기에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愼獨의 절실함이 진실되고 독실하여 하늘의 덕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늘[天]을 理라고 하고 鬼神을 功用, 造化의 자취, 理氣의 良能이라고 하니 마음으로 그것을 앎이 애매하기 짝이 없어 마치 知覺이 없는 자와도 같다. 어두운 방 안에서 마음을 속이고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으며 종신토록 道를 배워도 堯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모두 鬼神의 說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中庸講義, 위의 책 p.71)


31) “未發이라는 것은 喜怒哀樂의 未發일 따름이다. 어찌 죽은 나무, 불꺼진 재와 같이 생각과 염려가 없는 것, 마치 禪家의 入靜과 같은 것일 수 있겠는가?”(위의 책 p.64)


32) “喜怒哀樂이 발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도 경계하고 삼갈 수 있으며, 염려하고 두려워할 수 있으며, 이치를 궁구할 수 있으며, 의리를 생각할 수 있으며 천하의 사변을 헤아릴 수 있다.”(同上)


33) “未發이라는 것은 喜怒哀樂의 미발이지 心知思慮의 미발이 아니다.”(中庸自箴, 위의 책 p.47); “中庸 經文에서는 단지 喜怒哀樂의 未發이라고만 했을 뿐이다. 어디에 일체 思慮가 모두 未發이라는 말이 있는가?”(中庸講義, 위의 책 p.63)


34) “晋語(」國語」의 편명)에서 舅犯이 말하기를, ‘무릇 나라의 우두머리는 무엇보다도 喜怒哀樂의 節度를 알아 이로써 백성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어버이의 喪을 슬퍼하지 아니하고 국난을 구하려 한다면, 이는 도리어 喪을 즐거워하고 生을 슬퍼하며 亂을 기뻐하는 것이 되니, 이것은 喜怒哀樂의 절도가 뒤바뀐 것입니다. 어떻게 백성들을 이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옛사람이 喜怒哀樂의 절도를 논한 것은 이에 지나지 않으니, 그 氣味가 후세 성리가들의 논의와 같지 않다.”(同上)


35) 同上


36) “易에서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라고 한 것은 蓍卦의 됨됨이가 생각도 없고 행위도 없어 마치 매말라 사려가 없는 듯하지만, 일단 펼쳐서 네개씩 蓍草를 운영하여 易을 이루게 되면 만물이 와서 감응하여 드디어 천하의 일에 통하게 됨을 말한 것일 뿐, 이것과 우리 마음의 본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同上) 다산의 占法은 周易四箋 蓍卦傳(與猶堂全集 제3권 pp.468~474)에서 상세히 살필 수 있다.


37) “樂記에, ‘人生而情, 天地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라고 한 것은 한나라 초기 속유들의설이다. 古經에는 이러한 氣味가 없다.”(中庸講義, 與猶堂全書 제2권 p.63)


38) “불교에서는 마음[心]을 논할 때 매양 寂感으로 이야기하는데, 程伊川의 문인들이 양가(儒․佛)의 설이 합치한다고 여겨 未發․已發을 논할 때 오로지 이 귀절을 증거로 삼았다. (同上)


39) 同上


40) “中을 극진히 하는 것은 愼獨이 아니면 안되고, 和를 극진히 하는 것도 愼獨이 아니면 안된다.”(中庸自箴, 위의 책 p.48)


41) 中庸章句 1장, 經書(서울,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 1978) p.773.


42) “보이지 않는 것(其所不睹)이란 무엇인가? 하늘의 형체이다. 들리지 않는 것(其所不聞)이란 무엇인가? 하늘의 소리이다.”(中庸自箴, 與猶堂全書 제2권 p.46)

   다산은 「中庸」의 愼獨工夫說을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즉, 「中庸」 1장의 “其所不睹”․“其所不聞”과 “莫見乎隱, 莫顯乎微” 12장의 “費而隱”, 16장의 “視之而弗見, 聽之而不聞” 33장의 “上天之載, 無聲無臭” 등의 귀절들은 모두 감각할 수는 없으나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언급으로서 유사한 문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네 장의 구문들 가운데 16장(鬼神章)에서는 그 존재하는 무엇이 바로 귀신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따라서 1장, 12장, 33장의 구문들도 모두 귀신 혹은 귀신의 덕에 대한 언급이요, 더욱이 16장에서는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재계하고 제사지내게 한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郊祭(天子가 드리는 제사) 때에 받드는  上帝임에 분명하다고 하였다. (中庸自箴, 위의 책 p.46, 47, 52; 中庸講義, 같은 책 p.71)


43) 中庸自箴, 위의 책 p.47.


44) 同上


45) 위의 책 p.45.


46) 同上


47) “大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先儒는 이르기를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주관하는 것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愼獨의 공은 未發의 때에 그 적절하고 바른 것을 세워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게 하고 만물이 자라나게 하는 공의 기초를 닦음이니 어찌 세상의 큰 근본(天下之大本)이 아니겠는가? 達道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喜怒哀樂이 발하여 절도에 맞으면 안으로는 부자 형제, 밖으로는 군신 붕우 등 누구에 대해서나 나의 仁을 행하지 않음이 없고, 누구에 대해서나 나의 義를 행하지 않음이 없어 막힘없이 사방에 통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세상에 두루 통하는 길(天下之達道)이 아니겠는가?”(위의 책 p.48)


48) 中庸章句 1장, 經書 p.774.


49) “이 절(中和說)은 愼獨 君子가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길러 이룩한 지극한 공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지 세상 사람들의 性情을 통론한 것은 아니다.”(中庸自箴, 與猶堂全書 제2권 p.47)


50) 中庸章句 1장, 經書 p.775.


51) “萬物一體라는 말은 古經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다. 子夏가 四海안의 사람들이 모두 나의 형제라고 한 적은 있었지만, 어찌 초목금수까지도 나와 한 몸이 될 수 있겠는가? 中和의 덕을 이룩한 성인은 좁은 방 안에 앉아 있어도 喜怒哀樂의 발출이 모두 절도에 맞지만, 지위를 얻어 실천을 도모함이 없으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을 수 없고 만물이 자라날 수 없다. 반드시 人主의 지위를 얻어 堯․舜이 되고, 卿相의 지위를 얻어 皐․夔․稷․契이 된 후에 南正重이 하늘을 관장하고 北正犁가 땅을 관장하며 羲氏와 和氏가 曆象을 관장하고 禹와 稷이 물과 흙을 다스리며 益으로 하여금 불을 관장하게 하고 虞人들로 하여금 山澤에 불을 놓아 초목조수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中庸講義, 與猶堂全書 제2권 p.65) 


52) “옛날에는 道를 배우는 사람을 士라 하였으니 士는 곧 벼슬한다(仕)는 것이다. 그 중에 뛰어난 자는 제후에게 벼슬하였고 그보다 못한 자는 대부에게 벼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고 천하 국가의 일을 돌본 자를 士라고 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伯夷․叔齊․虞仲․夷逸 같은 이가 인륜의 변고를 만나 은거한 이외에는 아무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까닭없이 은거하여 괴이한 일을 행하는 것(素隱行怪)을 성인은 경계하셨던 것이다.”(五學論, 與猶堂全書 제1권 p.231)


53) 中庸 25장.


54) 주희는 漢書 藝文志의 기록에 따라 “素隱行怪”의 ‘素’字를 ‘索’자의 誤字로 간주하였다.(中庸章句 11장, 經書 p.789 참조)


55) “素隱이란 까닭없이 은거하는 것이다.”(中庸講義, 與猶堂全書 제2권 p.68)